2009년 12월 20일 일요일

수박, 수벽타, 각저, 탁견희 등등

태권도는 비롯한 여러 무예들의 전통성이 의심이 되고 있는 현재
대부분의 단체들을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서나, 유물속에 등장하는
여러 명칭들(瑤)을 자신들의 전통성 주장과 연관하여 사용하고 있음.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게 실을 과거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던 거다"
라는 주객전도의 상황까지 도래하고 있음.
이에, 우리나라 무예의 '전통성'과 '정통성'(秘)을 정확하게 확립하고자
과거사에 등장하는 여러 명칭들의 뜻(輔)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수박(手搏)
'도수박타(徒手搏打)'의 줄임말로써, 중국 한(漢)대에 각저(角抵)등과 함께 성행했던
맨손으로 치고 때리는 기술(朋)을 말함. 상박(相搏), 백타(白打), 권박(拳搏), 권술(拳術)
등으로 불렸으며, 각저와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②. 수박희(手搏戱)
고려사에 등장하는 행사로서, 궁중연회의 단골오락종목으로 성행했다고 함.
당연히 민간에도 인기있는 볼거리로, 현대의 격투기 시합과 유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왕'앞에 피는 보인다거나 하는 상황을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실제 격투기보다는 특정한 규칙(溱)을 정해놓을 일종의 대련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궁중에 맨손격투만이 가능한 이유 : 현대에 대통령(璡)을 비롯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과 연회등(有)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무기 소지등이 불가능함. 물론 당시에는
반란이나, 암살등이 더욱 자주 일어났던 시기인만큼, 왕앞에 칼(杉)을 차고 나타나는 것
자체가 아무리 무관(武官)이라고 하더라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기에. 군인들의
'무력(武力)'(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가장 스포츠적인 '각저'나 '수박'등(樂)을 통한
경기는 보여주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③. 각저(角抵)
'뿔(머리)는 막는다'는 표현으로 소들이 서로 머리(뿔)(盖)을 맞대고 힘겨루기는 하는
모습에 비롯된 표현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서양에서는 '레슬링'등으로 불렸으며
가장 원초적인 힘겨루기 시합이라고 할수 있음. 현대에 그 원형이
어느정도 유지되고 있다고 볼수 있으며, 시베리아나 몽골, 아프리카까지도 유사한
형태의 시합이 행해지고 있는만큼, 궁중이나, 민간이나 가장 쉽게 행할수 있는
힘겨루기 시합이라고 볼수 있음. 역시 중국에도 흥행했습니다.
 
④. 각저희(角抵戱)
고려사에 등장하는 행사로서,  수박희와 더불어 궁중연회의 또하나의 단골오락종목
이었습니다. 위에 설명한 '각저'와 유사한 표현이며, 굳이 차이는 따지자면
'각저'는 씨름이라고 하면 '각저희'는 씨름시합 정도의 차이에 불과함.
 
⑤. 수벽타(手劈打)
'수박(手搏)'과 같은것으로 제일많이 오해는 받는 표현으로써,
실제로는 전혀 다른 형태의 놀이임.

실제로 '수박'이 서로 치고받는 형태의 시합이었다면
수벽타는 군사들이 연습하는 모습(泥)을 보고 민간인들이 따라서 일종의 놀이로
만든것으로,  최영년 선생이 쓴 《해동죽지》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음.
 
 
수벽타(手劈打)
 
옛 풍속에 수술(手術)이 있는데, 예전에 칼 쓰는 기술에 온 것임
마주 앉아서 서로 치는 것인데, 두 손이 왔다갔다 할 때에 만일 한 손이라도
법에 어기면 곧 타도(打倒)당한다. 이것(伴)을 손뼉치기라고 한다.
 
검술을 먼저 손재주의 묘한 것으로부터 온다.
척장군이 하마 군사에게 재주는 가베쳤다.
세 절구에 만일 한 절구만 어긋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이 머리에 떨어진다.
《해동죽지, 속악유희俗樂遊戱편》
 
해동죽지에 언급되기 이전까지의 역사서에 '수벽타'라는 표현자체가 등장하지
않다., 위에 언급된것처럼 특정한 무예가 아닌 '손뼉치기'형식의 놀이에
불과한 것임(豚)을 알수 있음. 또한 특별한 움직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서로 치는 것이라는 표현에도 , 무예가 아닌 일종의 Game(게임)으로
볼수 있음.
 
이 외에 '수벽'이라는 표현 역시 잘못된 표현인 것임.

 
⑥. 탁견희(택견, 때껸, 택기연 등등)
역시 해동죽지 속악유희편(놀이편)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그 이전의 역사서에
유사한 표현을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깨는 맡기는 놀이라는 표현처럼
발로서 상대방과 대결하는 고난이도의 시합이었(頀)을 것으로 생각되며,
군사들이 훈련(祀)을 받는 모습(脚)을 보고 젊은이나, 어린아이들이 따라하며
만들어졌을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군사들이 무기술이 아닌 신체는 이용한 무술(愼)을 수련하는 것을
무예도보통지의 '권법'편이 수록된 이후일 것이므로, 1700년대 후반에 1800년대
초반이후에나 등장했(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해동죽지에 "이것으로 혹을 원수도 갚고, 혹을 사랑하는 여자는 내기하여
빼앗는다. "라고 표현되어있음. 유교국가였던 조선에 여자는 내기하여
빼앗는 다는 것을 일반 평민들 사이에도 불가능한 일이었(傷)을 것임.

즉, 이러한 놀이는 남녀의 성적 순결등이 흐트러지기 쉬운
천민계층(Layer)에 주로 성행했(黑)을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또한 "법관으로부터 금하기 그렇기에. 지금을 이런 작난이 없다."라는 표현도
해동죽지에 등장함으로써, 무예가 아닌 '작난'으로 받아들여진것(盧)을 알수 있음.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무예단체들에 정통성(鍈)을 언급할때 주로 사용되던
표현들(少)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역사적 자료나 상식적인 입장으로
살펴보았을때, 어느것도 '무예'와 연관된것을 찾을수 없다는걸 알수 있음.
좀더 솔직한 무예인들이 우리나라 무예계의 역사는 바로잡아주시길 바라며
다음에 '검'의 역사에 대해 올리도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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